산하엽

비가 많이도 적게도 내리지 않는 새벽 7시부터 희연을 서둘러 깨웠다. 밤새 생각이 나를 잠식하려는 통에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다. 일렁이던 기분이 극심해져서 속까지 울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희연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환기를 하려 창문을 조금 열어보니 밤새 비가 왔는지 땅에 얼룩이 심하게 져있었다.

희연: 왜?
윤희: 산책하러 갈래? 생각 때문에 너무 괴로운 밤을 보냈어.
희연: 네가 밤새 뒤척이는 것 같더라. 그래 나가자. 잠깐이라도 걷고 들어오자. 요새도 잠을 잘 못 자?
윤희: 응.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작년부터 심해졌네. 같이 나가줘서 고마워. 이제 여름이 시작되려고 하는지 덥고 습하다.
희연: 그러게 지난주까지만 해도 선선했던 거 같은데.

윤희: 사실 나는 딱 이런 계절의 느낌을 가장 좋아하긴 해. 축축하고 따뜻하잖아. 하지만 감정이나 기분과는 별개로 나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이맘때쯤이면 항상 잠을 자는 날보다 어서 빛이 나의 머리맡을 밝히길 바라며 괴로워하는 밤이 더 잦아. 그래도 바깥바람을 쐬면 잠깐은 괜찮아지더라고.
희연: 그래. 그럼 가볍게 뒷산이라도 갔다 오자.

나는 밤새 뒤척이며 끈적해진 옷을 벗고 얇은 반팔로 갈아입었다. 목이 약간 파인 흰색 v넥 티셔츠였다. 희연이는 나를 빤히 보다가 오히려 가방에 챙겨온 얇은 바람막이를 꺼내어 입었다. 우리는 신고 온 운동화를 구겨 신은 후 작은 우산을 나눠쓰기로 마음먹으며 문을 나섰다. 나눠 쓴 우산의 여백만큼 빗물이 우리의 피부에 닿아 동그랗게 흘러내렸다. 그리곤 아침밥 메뉴 이야기, 어제 카페에서 옆자리 사람들이 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우리가 잡은 숙소 앞에 있는 골목을 지나니 뒷산의 초입 부분이 보였다. 나는 걷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윤희: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내 피부가 투명해져서 안에 있는 가시가 거죽을 뚫고 다른 사람을 찌르진 않을까? 속에 있는 끈적함을 남들에게 들키진 않을까? 하는 것들 말이야.
희연: 왜 그런 생각이 들어?
윤희: 몰라.
희연: 언제 그런 생각이 주로 드는데?
윤희: 군집에 속해있을 때. 혼자 있을 때. 때때로 가끔. 때때로 자주.

나는 그것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알고 싶어 하지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하게도 항상 그래왔던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독 파랗게 튀어나온 핏줄은 가시가 되어 얇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울렁거리는 속은 너무도 끈적거렸다.

희연: 그것들이 때때로 너에게 고통을 주니?
윤희: 아니. 사실 그 가시들이 다른 사람을 찌른다고 해도, 끈적이는 무언가를 남들에게 들킨다고 해도 나는 별로 상관없어.
희연: 그러면 뭐가 문제야? 상관없잖아.
윤희: 그렇지. 상관없다고 한다면 상관없지. 다만, 나는 나의 가시를 뭉툭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야. 나의 속에 찰랑이는 액체를 채워주어서 맑게 희석해 줄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야. 그런 사람을 꼭 찾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잠을 못 자게 되더라고.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매끈한 사람이 아니었다. 매끈하면 내가 가진 가시에 찔리기만 할 뿐이니까. 나의 가시보다 더 작고 빼곡한 가시를 가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물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도 아니었다. 너무 묽지도 되직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끈적이는 액체 위에 물 같은 건 부어봤자 섞이지 않으니까. 나는 인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밤새워 했던 생각들이 나를 다시 잠식할 것 같아서 애써 머리를 휘젓고 풀과 나무를 바라보았다.

윤희: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

나는 손짓을 하며 작은 돌탑들의 더미가 놓여있는 곳으로 희연을 잡아끌었다. 조금은 비에 젖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 같이 쓰고 있던 우산에서 벗어나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가장 작은 돌탑의 꼭대기에 납작한 돌을 고르고 골라서 살며시 내려놓았다. 사실 항상 나를 정제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돌탑에 빌 나의 소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옆에 있는 몇 없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건강한 것이었다. 어릴 땐 누군가의 행복과 건강을 빈다는 것이 너무 상상력이 부족하고 거창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정작 소원을 빌 때면 빌고 싶은 것이 그것밖엔 없었다.

희연: 몰랐는데 돌탑이 있는 걸 보니까 이 근방에 사찰이 있나 봐. 근데 왜 제일 쉬운 곳에 돌을 쌓는 거야? 원래 어려운 곳에 쌓아야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서 소원을 더 잘 이루어주는 거 아니었어?
윤희: 글쎄? 이루어져도 안 이루어져도 상관없나 보지.
희연: 별로 간절한 소원은 아니구나?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윤희: 소원을 물어봐서 대답해 주는 사람을 본 적 있어? 나는 항상 대답해 준 적이 없는데.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희연이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나의 팔을 잡아끌어 다시 우산을 씌워주었다.

윤희: 희연아. 너는 몇 살 때까지 살고 싶어?
희연: 갑자기? 음... 나는 150살?
윤희: 왜? 너무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거 아니야?
희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 정리하고 죽고 싶어서. 원래 남아있는 사람은 항상 힘든 시간을 보내잖아. 나는 무딘 편이어서 남들보다 덜 힘들어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희연이 다운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희연이는 나무보다는 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돌멩이보다는 모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절대 부러지진 않을 것 같은 사람. 바람에 날아가도 금방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었다.

희연: 너는?
윤희: 나는 45살. 아니 사실 언제 죽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가능한 한 빨리. 너랑은 다르게 나는 이기적인 편이잖아. 남들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을까 싶어. 알겠지만 친했던 사람과 멀어지기만 해도 온갖 미련은 다 떠는 사람이잖아.
희연: 정이 많아서 그렇지.
윤희: 아무튼 내 장례식은 너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내가 좋아했던 노래들 리스트업 해놓을게.
희연: 같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열심히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야겠네.

사실 희연이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정이 많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기에. 오히려 차갑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방울

"내가 너를 생각할 때면 불빛 두 개와 자욱한 연기가 생각나."

나는 깊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얕디 얕은 생각과 내일 뭐 벌어먹고 살지와 같은 현실적인 생각들이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뿐이다. 두 개의 불빛과 연기는 내일에 대한 고민이다. 내일이 되면 또 그 내일에 대한 고민이 생기겠지. 어떤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고민을 내일 하면 되지 않냐고 한다.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고민을 미리 하냐고. 왜 미리 불안해하느냐고.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미리부터 불안해 하는 성격으로 태어났고, 그 성격은 고칠래야 고칠 수 없다. 이 고질병같은 성격이 항상 나를 옥죄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더 살기 쉽게 만들어주곤 한다. 그 고민을 너는 항상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나와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사람이기에.

"나는 널 생각하면 곱슬머리와 안경을 쓰면 작아지는 눈이 생각나. 그리고 마른 몸."
"마른 몸?"
"너는 항상 마른 몸이 너의 콤플렉스라고 얘기하곤 하지만 나는 너를 생각하면 마른 몸이 생각나."

너는 항상 마른 몸이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루를 셈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너는 아픈 사람들의 몸은 말라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최대한 몸을 부풀린다. 그것을 알면서도 반응이 보고 싶어 짓궂게 괜히 마른 너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네가 쉬는 숨이 매일 보여. 너는 얕은 숨을 쉬지 않잖아. 크고 깊은숨을 쉬잖아. 내가 마른 몸을 생각하는 만큼이나 너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잖아."
"그래. 맞아."
"그리고 네가 목 뒤를 긁는 것도 보여. 너는 습관처럼 목 뒤를 긁잖아.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양."

나는 불안이 찾아오곤 하면 항상 목 뒤를 긁는다. 내 불안은 항상 내일에 대한 것이다. 지나간 어제가 아닌 찾아올 내일. 그리고 이름 붙이자면 찾아올 내일 내가 해야할 일. 나는 매일 아침 6시가 되면 눈을 뜬다. 그리고 6시 20분까지는 씻고 옷을 입는다. 6시 20분에서 7시까지는 아침밥을 먹으며 그간 밀렸던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곤 한다. 7시가 넘으면 작업실로 향한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업 해놓고 하나씩 해나간다. 나의 불안은 한 가지 일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곤 한다. 그래서 정해놓은 리스트를 루틴처럼 돈다. 어제의 불안은 오늘의 루틴이 깨질까봐 했던 걱정들에서 나온다. 하지만 오늘도 어떠한 걸림돌 없이 매일 했왔던 행동들을 반복한다. 먼저, 주변을 정리한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의 작업은 매일 조금씩 상이하다. 모양, 공간, 빛 그리고 색깔.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고 오늘이 내일과 비슷하다. 하지만 어제와 내일은 꽤나 다른 작업을 하고 있다. 그것이 컴퓨터로 하는 무엇인가가 될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손으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소리를 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너는 내가 그 얘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왜 오늘도 그런 얘기를 꺼내고 마는 거야?"
"나도 나의 마른 몸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너는 나에게 하루에 몇 번이고도 나의 마른 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아?"
"그러게. 내가 그랬었네."
"너는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항상 나를 흔들어 놓는 거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알지? 왜 내가 항상 너의 물을 받고 있는 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
"아니. 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물이 올라오지 않도록 막고 있는 기분이야."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리고 네가 나의 물을 받고 있는 컵이 된 것 같다는 기분도 알 것 같다. 하지만 네가 내가 떨어뜨리는 물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말과 별개로 나를 받치고 있다고 하면 말이 달라진다. 나는 오히려 스스로가 네가 넘치지 않게 막고 있는 판자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가 언제 끓어올라 넘칠 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그것을 위태롭게 막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끓어오르는 물은 구멍이 없으면 넘쳐흐른다. 그게 너와 나의 관계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우리의 다툼의 사소한 원인이 되었다.

의태

나의 옆에 누워있던 예희는 끊임없이 잔기침을 했다. 예희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가습기를 켜고 따뜻한 물 한 잔을 준비해서 탁상 위에 두었다.

윤희: 예희야. 잠깐 일어나봐.
예희: 왜?
윤희: 물 한 잔만 마시고 다시 누워.
예희: 알겠어.

나는 예희가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라서 무서웠다. 건조하디 건조한 사람이라서.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빠르게 타올라서 하얀 재가 되어버릴까봐.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할지 가늠하기 항상 어려웠다.

예희: 물 마시니까 잠이 안 와.
윤희: 그럼 그냥 나랑 얘기할래?
예희: 그래. 어떤 얘기라도 해봐.
윤희: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내가 어릴 때 병아리를 두 마리 키웠었거든? 한 마리가 비가 많이 오는 여름밤에 죽을 거 같은 거야. 알지? 생명이 꺼져가는 특유의 찬 기운.
예희: 알지.
윤희: 그래서 빨리 그 병아리를 손수건에 싸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근데 의사선생님이 자기네는 조류는 치료해줄 수 없다고 하는 거야. 그땐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어. 동물 병원은 포유류만 갈 수 있는 병원인가? 식물을 제외한 모든 유기체가 동물 아니었나? 식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생물이 동물이라고 생각했거든. 아무튼 이런 의아함은 속에 접어두고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물었어.
예희: 그래서?
윤희: 조류 병원에 가지 않을 거면 설탕물을 주래. 내가 어떻게 조류 병원에 가겠어.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심지어 부모님은 회사에 가셨었거든. 그래서 집으로 다시 뛰어가서 설탕물을 멕였지.
예희: 설탕물? 설탕물이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그냥 설탕물인데 그걸 왜 줘?
윤희: 그러게. 근데 웃긴 게 잠깐 정신을 차리더라.
예희: 신기하네. 그래서 그 후로 괜찮아졌어?
윤희: 아니. 두 시간정도 살아있다가 죽었어. 근데 있잖아.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오래 입원을 하시다가 며칠 전에 집에 오셨대. 계속 아파하시면서 천장에 뱀이 기어다닌다는 말을 하셨대. 너무 목이 마르다고 하셔서 설탕물을 타드리니까 괜찮아지셨대.
예희: 설탕물이 힘이 있나?
윤희: 몰라. 근데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실까봐 겁이 나. 내가 키우던 병아리처럼. 잠깐 힘을 냈다가 다시 차가워졌던 것처럼.

말을 끝내고 쳐다본 예희의 눈에는 습기가 가득 차있었다. 잠시동안은 네가 타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비 내리는 날의 먼지

비 오는 날 새벽 여진이는 먼지를 털고 있다. 어디에 먼지가 앉아있을까 쉼 없이 고민을 하며 작은 먼지가 내려앉은 곳부터 어제 저녁 끊임없이 걸레질을 해온 터에 먼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까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털고 있다. 새벽 4시 항상 여진이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오늘은 30분만이라도 더 자길바라며 잠들었던 1시 17분의 꿈이 깨지며 오늘도 어김없이 4시에 일어났다. 매일같이 강박증적으로 3시간 남짓을 자는 여진이는 설거지할 수 있는 그릇도 없는데 선반위의 모든 그릇과 컵을 꺼내 씻기 시작한다.

"왜 또 아침부터 설거지를 요란하게 해?"
잠에서 깬 수연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여진이에게 묻는다.

"아니야. 자. 잠이 안 와서 청소라도 하고 있는 거야. 미안해. 조용히 할테니까 마저 자."
"왜 새벽부터 모든 그릇들을 꺼내서 다시 설거지를 하고 있는거야?"
"아니 이 그릇 좀 봐.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오래되고 더러운 그릇을 버리지도 않고 있었을까? 우리집에 예쁜 그릇들이 분명 많았던 것 같은데 다 어디로 간 거지?"
"여진아.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침실로 가자. 누워서 마저 얘기해보자."
"알겠어."

하지만 수연이 옆에 누운 여진이는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천장에 달려있는 조명 빛이 탁해진 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걸레를 들고 닦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리곤 수연이가 건네는 따뜻한 카모마일 티를 마시며 안정감을 느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 안정감은 잠시도 지속되지 않았다. 여진이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단번에 눈을 떠서 수연이를 보며 말했다.

"수연아, 우리 집의 그릇들이 사라진 이유를 알아냈어. 꿈 속에서 깨닫게 되었어."
수연이는 횡설수설하는 여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한편 애써 궁금한 눈빛을 가지려 노력하며 말했다.
"정말? 그러면 말해봐. 어떤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릴 때의 내가 나왔는데 나는 실제로도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거든. 하늘을 한없이 보고 있다가 현주를 봤거든. 내가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어릴 때 우리집 옆집에 살던 친구 말이야. 근데 그 친구와 주변이 모두 파랗게 보이더라. 파랗게 보이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있어? 파란색 세상은 모든 게 명확하지 않아. 물건들도. 그리고 사람들도. 한 겹의 색이 덧씌워지는 것뿐인데 거리감이라는 게 없어져."

"응, 근데 거리감이 왜?"
"거리감. 거리감이 제일 중요하잖아. 내가 살아있는 한. 근데 그게 없어진 거야. 그리고 그 애가 쥐고 있던 컵조차 그 애한테 흡수되어 버린 거지. 파란색은 상실의 색이야."

여진이는 수연이의 눈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에서 깨닫게 된 것을 수연이와 나누고 싶었다.
← 메인으로